배드베드북스의 10년과 사명을 찾아서 - 1부
김승일 ·
BadBad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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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베드북스는 편집자와 디자이너와 시인, 이렇게 셋이 2014년에 만든 출판사다. 10년이 더 됐지만 아직 책은 다섯 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지금껏 나온 책도 구성원 중 한 명인 김승일 시인이 일정 기간 쓴 일기, 작업 노트, 시를 모아서 만드는 N월의 책 시리즈 네 권뿐이었다. 그러니 이번에 출간된 유리관 작가의 <사명을 찾아서>는 배드베드북스가 실제로 누군가와 계약하여 만든 첫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 내 소개가 늦었다. 나는 김승일 시인이다. 내 생각에 10년 동안 책을 많이 내지 못한 것은 우리가 바쁘고 게을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은 모든 인간 존재에 내재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우리의 어리석음, 특히 이 회사의 바지 사장인 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배드베드북스의 비전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었다. 나는 모양이 이상한 책을 만들고 싶었다. 예컨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책이나 가장 큰 책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회사의 편집자는 그런 것들이 책이 아니라 굿즈라고 했다. 기록되어 마땅한 정보를 읽기 좋게 담은 책이 아니라, 이미 범람하는 마케팅 수단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그렇다면 굿즈로 소비될 그 무엇도 출판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자! 하지만 우리는 가난했고, 책을 팔아 돈도 벌고 싶었다. 우리는 굿즈가 아니면서 돈도 벌 수 있는 책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정말 많은 책을 상상했다. 그러나 종이책은 굿즈였고, 책은 돈을 담보하지 않았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왜 이렇게 어리석었지? 돈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편집자와 디자이너는 별로 돈, 돈 거리지도 않았다. 다들 자기 직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시인인 나만, 시인이 직업이 아니기 때문에 배드베드북스가 책을 팔아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인 것은 인간이 종종 정신을 차린다는 것이다. 그냥 우리 뭐든 재미로 하자. 돈 버는 방법이 적힌 책은 내지 않겠다는 각오 속에서도, 독립 출판으로 돈을 벌겠다는 어리석음 속에서도 재미는 있었지만……. 제일 재밌는 건 배우는 즐거움인 것 같았다. 그간 나는 돈 벌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얼마나 재밌는 것인지 배웠다. 큰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코미디 소재로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재밌다는 사실을 배웠다. 우리는 <사명을 찾아서>를 출판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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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을 찾아서>는 문예계 팀 블로그 곡물창고(gokmool.blogspot.com)에서 유리관 작가가 연재한 글을 모은 책이다. 편마다 형식이나 전개 방식이 상이하지만, 전반적으로 유리관이 출판사 이름을 하나 지어내고, 그 가상의 출판사가 어떤 출판사인지 소개하는 내용이 담겼다. 출판사 이름이 ‘관둠’이면, 그 출판사의 구성원은 모두 출판사를 관둔 외주 출판 노동자라는 식이다. ‘관둠’ 출판사에도 외주 출판 노동자에게 연락할 사람이 필요한데, 그 연락책 역시 외주로 구하면 어떨까? 그런 터무니 없는 생각으로 가득 찬 연재였다.
나는 유리관이 상상한 출판사들이 배드베드북스의 10년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치 창출을 위해 무엇이든, 그야말로 실로 무엇이든 해보려고 했던 10년, 부동산에서 집 보여주려고 쓰는 VR촬영 카메라를 사서, 책을 낱장으로 인쇄해서 집안 곳곳에 붙여 놓고, 3D 투어 VR책 같은 걸 만드려고 했던(이제 책을 읽지 말고, 시공간으로 체험하세요) 10년. 그러나 정작 카메라가 너무 비싸서, 생각해 보니 의미가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10년 말이다. 유리관이 상상한 출판사들과 배드베드북스가 다른 점은, 배드베드북스가 가상의 출판사가 아니라 출판 면허와 사업자 등록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내가 10년 전에 이 연재를 읽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뭐라도 해보려고 하면서 아무것도 안 했던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게 아닌가? 시간 낭비와 실패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글만 읽고 배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내가 <사명을 찾아서>에서 배운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줘야 한다는 사명을 찾았다. 이 연재를 책으로 꼭 만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돌이켜 보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이다. - 2부에서 계속